TSMC의 '초격차'는 복제 가능한가? 009번 직원이 해독한「대만 사회 + 모리스 창」의 절대 공식

TSMC
저자:林宏文
TSMC의 '초격차'는 복제 가능한가? 009번 직원이 해독한「대만 사회 + 모리스 창」의 절대 공식

2026년에 접어들며,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 구마모토에서 독일 드레스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천억 달러가 투입되는 '반도체 자국 내 생산(현지화)'의 광풍이 불고 있다. 각국 정책 입안자들과 빅테크 기업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만 TSMC의 성공은 과연 완벽하게 복제될 수 있는가?"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차가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40년 가까이 이어진 깊은 대화 속에 숨겨져 있다.

지난 3월 7일, 필자는 '규슈·대만 미래연구소'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TSMC의 창립 멤버(사번 009번)인 천젠방(陳健邦) 전 부사장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TSMC의 초심, 야망, 그리고 신화'를 주제로 1987년 창립 당시로 돌아가, 창업자 모리스 창(張忠謀) 곁에서 지켜본 생생한 관찰기를 공유하며 TSMC '초격차 패권'의 유전자를 해독했다.

그림 1: 'TSMC의 초심, 야망, 그리고 신화'를 주제로 강연 중인 천젠방(陳健邦) 전 부사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앞줄 오른쪽부터 국립정치대학교 이세휘(李世暉) 교수, 천젠방 전 부사장, 일반사단법인 규슈·대만 미래연구소 창립자 겸 이사인 구마모토 나오키(隈本直樹) 씨, 그리고 본 칼럼의 필자 임홍문(林宏文) 씨. (사진 제공: 구마모토 나오키)
그림 1: 'TSMC의 초심, 야망, 그리고 신화'를 주제로 강연 중인 천젠방(陳健邦) 전 부사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앞줄 오른쪽부터 국립정치대학교 이세휘(李世暉) 교수, 천젠방 전 부사장, 일반사단법인 규슈·대만 미래연구소 창립자 겸 이사인 구마모토 나오키(隈本直樹) 씨, 그리고 본 칼럼의 필자 임홍문(林宏文) 씨. (사진 제공: 구마모토 나오키)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담과 달리, 오늘날 전 세계 AI 컴퓨팅 파워의 명줄을 쥐고 있는 이 반도체 제국은 사실 "고객의 요구를 군말 없이 수용하며 가격마저 저렴한" 굽히는 자세에서 출발했다.

천 전 부사장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모리스 창이 어떻게 '가장 덜 나쁜 선택(The Least Evil Choice)'이라는 철학으로 반세기 동안의 산업 방향을 정확히 예측했는지 엿볼 수 있다.

전 세계가 '공업'의 논리로 웨이퍼 공장(팹)을 세우려 시도할 때, 천 전 부사장은 국제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반도체는 공업이 아니라 농업이다. TSMC의 본질은 사실 '대만 사회(Taiwan Society)'에 '모리스 창'이라는 인물이 더해진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고객 입맛에 맞고 저렴했던" 하청업체: 009번 직원이 본 10년의 칩거

TSMC 초기 10년 동안 역대 3명의 최고경영자(CEO)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당시 한 외국인 CEO는 고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I like you, you are easy to talk to, and cheap." 즉, 초기 TSMC는 고객의 눈에 그저 말 잘 듣고, 타협하기 쉬우며, 가격 경쟁력(가성비)까지 갖춘 위탁생산 파트너에 불과했다.

그래서 누군가 TSMC의 주요 전략을 물었을 때, 천 전 부사장은 "사실 첫 10년 동안 회사의 Top 10 전략은 오로지 '비용과 서비스(Cost and Service)'였다"고 회고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강연장에서 당시 직접 찍은 사진을 공개했는데, 회사 벽면에 붙은 10대 전략 리스트에는 1번부터 10번까지 똑같이 'Cost and Service'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2 참조)

천 전 부사장은 TSMC 내에서 모리스 창의 역할이 단계적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1987년 설립 당시, 모리스 창은 대만 반도체의 요람인 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을 겸임하고 있어 TSMC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첫 10년간 경영은 세 명의 미국인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당시 일반 직원들이 느끼기에 모리스 창은 매우 엄격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존재였으며, 고위급 임원들과만 교류했다.

상황이 바뀐 건 1994년 TSMC가 상장하면서부터다. 모리스 창은 더 큰 야망을 드러내며 기술력으로 글로벌 경쟁사를 뛰어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997년, 그가 직접 회장 겸 CEO로 등판하면서 회사의 전략은 공식적으로 '비용과 서비스'에서 '기술 선도와 초격차'로 전환되었다.

모리스 창은 2007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창업 당시 팹리스(Fabless, 공장이 없는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산업이 이토록 번성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의 원문은 이렇다. "I can’t tell you that I saw the rise of the fabless industry, I only hoped for it(팹리스 산업의 부상을 예견했다고 말할 순 없다. 단지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을 뿐이다)."

그림 2: TSMC의 초격차 성공 신화는 꺾이지 않는 집념과 확고한 신념,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실행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사진 제공: 구마모토 나오키)
그림 2: TSMC의 초격차 성공 신화는 꺾이지 않는 집념과 확고한 신념,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실행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사진 제공: 구마모토 나오키)

2014년, 순수 파운드리(Pure-play Foundry)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This is The Least Evil Choice, it was the solution waiting for a problem to happen(이것은 가장 덜 나쁜 선택이었고, 발생할 문제를 기다리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즉, 모리스 창은 애초에 팹리스 산업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하진 못했지만, 팹리스 기업들이 제조 하청을 찾게 될 것이라는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순수 파운드리라는 '해결책'을 선제적으로 구축해 둔 것이다. 이는 선견지명 있는 인프라 구축이었다. 시장의 수요(문제)가 폭발했을 때, TSMC는 이미 그곳에서 해답을 제공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한 후 더 중요했던 것은 끈기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행력이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TSMC의 '초격차 독주' 신화를 구축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모리스 창은 셰익스피어의 명언 "The World is My Oyster(세계는 나의 굴이다)"를 자주 인용했다. 이 말은 기술 독립에 대한 그의 집념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작은 하청 공장에서 세계 시가총액 6위의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한 장엄한 서사시를 압축해 보여준다.

본래 이 명언은 무력으로 부를 쟁취하겠다는 뜻이지만, 모리스 창의 해석 아래에서는 "기회는 도처에 널려 있고, 주도권은 내 손에 있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발전했다. 그에게 '굴'은 단단한 껍데기 아래 숨겨진 성공의 진주를 뜻했고, 이를 여는 '검'은 세계 일류의 기술력이었다. 초기 대주주였던 네덜란드 필립스(Philips)의 특허 의존에서 벗어나 기술적으로 독립해야만 TSMC가 글로벌 무대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림 3: 천젠방 전 부사장은
그림 3: 천젠방 전 부사장은 "TSMC가 세계 일류의 기술력이라는 '검'을 휘둘러 전 세계 시장의 문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사진 제공: 구마모토 나오키)

농업 풍토론과 공생 생태계: TSMC는 왜 복제하기 어려운가?

천젠방 전 부사장은 TSMC의 발전 과정을 3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1987~1994년)는 두 개의 6인치 웨이퍼 팹만으로 전력 질주하던 '초심의 시기'였다. 1991년 모리스 창이 연 매출 100억 대만달러(약 4,200억 원)라는 목표를 세웠을 때, 대만 전체에 이 기준을 충족하는 상장사는 30여 곳에 불과했고, 고객들은 여전히 TSMC를 "말 잘 듣고 저렴한" 파트너로만 평가했다.

그러나 모리스 창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7년 그가 직접 CEO를 겸임하며 파운드리에 집중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제2단계는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시기였다. 그는 쩡판청(曾繁城) 부회장과 함께 해외에서 일류 인재들을 대만으로 대거 영입했다.

그 성과는 경이로운 수치로 증명되었다. 2025년 초 기준, TSMC의 '일일 평균 매출'은 이미 100억 대만달러를 돌파했다. 1990년대 회사가 1년 내내 매달렸던 목표를 단 하루 만에 달성하게 된 것이다. 모리스 창 역시 "2025년 현재 TSMC의 규모와 중요성은 당시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고 고백했다.

물론 이 시기 좌절도 있었다. 뱅가드 인터내셔널(VIS)을 통한 DRAM 사업 진출이나 초기 미국 8인치 팹 투자는 뼈아픈 실패로 꼽힌다. 그러나 모리스 창의 진가는 빠른 궤도 수정에 있었다. 과감히 DRAM 산업에서 철수하고 미국 구형 팹에 대한 추가 투자를 보류한 채, 핵심인 파운드리 사업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켜 끝내 '초격차 독주'의 마법 공식을 완성했다.

제3단계에 접어들며, TSMC는 글로벌 전후방 산업과 협력하는 완전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천 전 부사장은 1983년 일본 반도체 선구자인 마에다 가즈오(前田和夫)의 발언을 특별히 인용했다. "반도체는 공업이 아니라 농업이다." 이른바 '농업 풍토론'은 산업 환경, 인재 육성, 법규, 직업 윤리, 사회 풍속 및 산업 클러스터가 바로 반도체를 잉태하는 '토양'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TSMC의 성공은 대만에 완비된 이 생태계적 토양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칩 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Chris Miller)는 TSMC의 가장 핵심적인 해자(Moat)가 바로 '임베딩(Embedding, 내재화)'과 '공생(Symbiosis)'에 있다고 분석했다. TSMC는 글로벌 공급망에 스스로를 깊숙이 심어 없어서는 안 될 일부가 되었다. 엔비디아(NVIDIA) 젠슨 황 CEO는 대만을 '숨은 영웅(The unsung hero)'이라 칭했고, 2024년 일본 매체 <주간 다이아몬드>는 TSMC를 가부키의 '구로고(黒衣)'에 비유했다. 무대 위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 전환을 돕는 검은 옷의 조력자이지만, 이들이 없으면 극 자체가 진행될 수 없는 핵심 존재라는 것이다. (그림 참조)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조차 IC 산업에서 TSMC를 "그들 자체가 하나의 메이저리그이며, 경쟁자는 전혀 없다"고 극찬한 바 있다.

성공 DNA 해독: 4대 핵심 경쟁력과 대만 사회의 특질

천 전 부사장은 전 TSMC 수석 과학자이자 현재 스탠퍼드대 전자공학과 교수인 필립 웡(Philip Wong)의 촌철살인 같은 분석을 소개했다. TSMC라는 네 개의 영문 알파벳은 본래 '대만 반도체 제조 회사(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약자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만 사회(Taiwan Society)'와 '모리스 창(Morris Chang)'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소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이어서 천 전 부사장은 대만이 TSMC를 잉태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사회적 배경을 분석했다.

  1. 작기 때문에: 외부와 반드시 협력해야 했고, 이는 긴밀한 산업 클러스터(군집) 효과를 촉발했다.
  2. 가난했기 때문에: 초기 자원의 결핍은 필사적으로 생존하려 발버둥 치며 끝까지 버텨내는 강인한 근성(Resilience)을 만들어냈다.
  3. 일본에 인접했기 때문에: 1980년대 세계 1위였던 일본의 기술을 오랫동안 우러러보며 맹렬히 추격했고, 마침내 그들을 뛰어넘었다.

더불어, TSMC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4가지 핵심 경쟁력을 갖췄다.

  • 진실성(Integrity)과 신뢰(Trust): 글로벌 최고 설계 회사들이 가장 기밀성이 높은 설계도를 안심하고 넘길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슈퍼 파워이다. (고객과 절대 경쟁하지 않는 순수 파운드리의 본질이다.)
  • 규모의 경제(Scale): 방대한 생산량은 가파른 학습 곡선과 압도적인 원가 우위를 가져다준다.
  • 공생 관계(Symbiosis): 일본의 장비 및 소재 업체(HOYA, TEL 등) 및 실리콘밸리 설계 회사들과 끈끈한 공생 생태계를 형성했다.
  • 투혼의 정신(Spirit): 나노 기술의 물리적 한계 앞에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결기를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아이폰 프로세서 양산에 성공하며 삼성과 인텔을 공식적으로 추월했다.

강연 말미, 천젠방 전 부사장은 자신의 커리어를 되돌아보았다. 그의 경험은 대만 정부가 국가적 '두뇌 유출(Brain Drain)'을 막기 위해 촘촘히 설계한 핵심 정책이 어떻게 TSMC 창립 팀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는지를 정확히 방증한다.

그가 국립대만대 물리학과와 칭화대 물리학 대학원을 다닐 당시, 동기생의 90% 이상이 유학을 떠났고 그는 대만에 남은 단 3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만 최초로 시행된 '국방공업훈저제도(최고급 이공계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군 복무 대신 국가 연구개발에 투입한 핵심 전략)'에 지원하여 산업기술연구원(ITRI)에서 복무했다. 이후 TSMC가 ITRI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스핀오프(독립)하면서, 국가 정책으로 남겨진 이 핵심 연구 인력들은 자연스럽게 전자연구소 동료들과 함께 TSMC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그는 "초기 직원이어서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고 근무 중에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여정은 정말 행운이었다"며 웃었다.

전 보스인 모리스 창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모리스 창은 목표치가 극도로 높았고 재무 보고를 엄격하게 따졌다(질책을 받다 눈물을 쏟은 임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업계 평균의 2~3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해 강력한 구심점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선택과 집중'이었다. 회사가 흑자를 내자 다각화 투자를 권유하는 외부의 목소리가 컸지만, 그는 이를 일축하고 전문 파운드리 본업을 굳건히 지켜냈다.

청중 중 한 명이 작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조산자(造山者, 산을 만드는 사람들)>에 본인도 나오냐고 묻자, 천 전 부사장은 유머러스하게 답했다. "저 자신은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모리스 창의 젊은 시절, 대만 경제 기적의 주역인 쑨윈쉬안(孫運璿), 리궈딩(李國鼎) 선생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속에 제가 모리스 창 뒤에 얼굴이 반쯤 잘린 채 서 있죠. 그 사진이 영화에 등장했으니, 그게 제 유일한 '카메오 출연'인 셈입니다."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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