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넘어선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야구혼(魂)에서 글로벌 반도체 패권까지, '팀 타이완(Team Taiwan)'의 생태계가 대만의 성공을 빚어낸 과정의 해체 분석

대만학
저자:林宏文
한국을 넘어선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야구혼(魂)에서 글로벌 반도체 패권까지, '팀 타이완(Team Taiwan)'의 생태계가 대만의 성공을 빚어낸 과정의 해체 분석

[편집자주] 대만은 어떻게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쥐고, TSMC라는 거대한 성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의외로 '야구장'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2026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대만 대표팀이 보여준 끈질긴 승부를 계기로 작성된 이 칼럼은, 야구와 반도체라는 두 가지 렌즈를 통해 대만 특유의 '팀 타이완(Team Taiwan)' 생태계 철학을 분석합니다. 과거의 뼈아픈 좌절을 딛고 일어선 대만 사회의 회복탄력성(Resilience),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강력한 라이벌들을 벤치마킹하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산업 경쟁력을 완성해 냈는지 심도 있게 조명합니다.

3월 둘째 주 주말, 대만 사람들의 감정선은 온통 야구장 그라운드 위를 향해 있었다. 2026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조별리그 초반 두 경기에서 대만 국가대표팀은 호주와 일본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하지만 이후 체코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진 숙명의 라이벌 한국과의 맞대결에서 5대 4라는 피 말리는 1점 차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는 대만 야구 역사상 WBC 무대에서 한국을 꺾은 최초의 쾌거였다.

많은 대만인들에게 있어 한국전의 승리는 단순히 1승 이상의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승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끈한 팀워크로 뭉쳐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사력을 다해 싸우는 '팀 타이완(Team Taiwan)' 특유의 불굴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팀 타이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주말, 대만의 문화예술계와 첨단 테크(Tech) 산업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인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는 대만이 가진 끈질긴 저력의 역사적 뿌리를 되짚어보는 뜻깊은 시간이 마련되었다. 대만 사회의 짙은 문화적 맥락에 익숙하지 않은 글로벌 독자들을 위해 그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100년의 기억과 화려한 부활: 리틀야구에서 세계 챔피언에 이르기까지, 대만 사회에 각인된 '회복탄력성의 DNA'

대만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클래식 악단으로 꼽히는 '원송 오케스트라(OneSong Orchestra, 灣聲樂團)'는 3월 정기 연주회의 테마를 '야구'로 선정했다. 이들은 대만 야구의 파란만장한 발전 역사를 되돌아보며, 각 결정적 순간을 상징하는 명곡들을 선별해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이날 음악회의 해설과 안내를 맡은 푸런(輔仁)대학교 의과대학의 정무췬(鄭睦群) 조교수는 젊은 시절 아마추어 야구 선수로 뛰었을 만큼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골수팬이다. 그의 깊이 있는 해설을 따라, 음악회는 역사적 서사를 중심축으로 삼아 대만 야구가 걸어온 발자취를 관객들과 함께 걸어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오프닝을 장식한 첫 번째 곡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태어난 대만인들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뛰게 만드는 익숙한 멜로디였다. 1972년,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TTV)은 연주곡 '식인종 선생님(Mr. Cannibal)'을 리틀야구 중계방송의 오프닝 테마곡으로 사용했다. 이 선율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은 어린 시절 한밤중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야구 중계에 열광했던 그 시절로 타임슬립을 하게 된다. 그 시절은 대만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뼈아픈 고립을 겪고 있던 시기였으며, 태평양 건너 미국 윌리엄스포트(Williamsport)에서 열린 리틀야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다투던 어린 소년들의 모습은 대만인들에게 유일한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자 위안이었다.

원송 오케스트라(OneSong Orchestra)가 주최한 '위 아 하오빵빵(We are 최고야)' 음악회 현장. 이날 연주된 모든 레퍼토리는 대만 야구의 역사와 관련된 곡들로 채워졌다. (사진 제공: 원송 오케스트라)
원송 오케스트라(OneSong Orchestra)가 주최한 '위 아 하오빵빵(We are 최고야)' 음악회 현장. 이날 연주된 모든 레퍼토리는 대만 야구의 역사와 관련된 곡들로 채워졌다. (사진 제공: 원송 오케스트라)

이어서 대만 야구사의 중대한 변곡점을 장식한 여러 곡들이 연주되었다. 1931년 일본 통치 시대 당시 대만 대표로 출전해 일본 야구의 심장인 고시엔(甲子園) 대회에서 준우승의 기적을 일궈냈던 '자농(KANO, 嘉義農林)'의 교가를 비롯해, 2001년 프로야구를 덮친 대규모 승부조작 사건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 야구 월드컵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던 순간을 상징하는 '다시 출발(再出發)', 그리고 대만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첸진펑(陳金鋒)의 은퇴를 기리며 록 밴드 파이어 이엑스(Fire EX., 滅火器)가 헌정한 '한때 미치도록(曾經瘋狂)'이 울려 퍼졌다. 대미를 장식한 프로야구 6개 구단의 응원가 메들리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자녀들이 귀여운 치어리더로 깜짝 등장해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열기는 한순간도 식지 않은 채 최고조에 달했다.

무척 흥미로웠던 점은 원송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 리저이(李哲藝) 역시 과거 중국문화대학교 야구부 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입었던 빛바랜 야구 유니폼을 차려입고 야구 배트를 손에 쥔 채 지휘 단상에 올라 정무췬 교수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심지어 엄숙한 클래식 음악홀 안에서 관객들의 파도타기 응원을 유도하며, 음악회를 순식간에 뜨거운 야구장 응원석으로 탈바꿈시키는 유쾌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또한, 글로벌 PC 산업의 선구자인 에이서(Acer)의 공동 창업자이자 현재 원송 오케스트라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황사오화(黃少華)는 1967년 국립교통대학교 재학 시절 야구부 주장이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 그라운드를 함께 누볐던 대학 동기 5명을 이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처럼 야구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이미 대만 각계각층을 이끄는 리더들의 DNA 속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 원송 오케스트라의 리저이(李哲藝) 음악 감독, 글로벌 PC 기업 에이서(Acer)의 공동 창업자 황사오화(黃少華), 그리고 원송 오케스트라의 천둥메이(陳冬梅) 최고경영자(CEO). 세 사람 모두 대학 시절의 야구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사진 제공: 원송 오케스트라)
왼쪽부터 원송 오케스트라의 리저이(李哲藝) 음악 감독, 글로벌 PC 기업 에이서(Acer)의 공동 창업자 황사오화(黃少華), 그리고 원송 오케스트라의 천둥메이(陳冬梅) 최고경영자(CEO). 세 사람 모두 대학 시절의 야구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사진 제공: 원송 오케스트라)

현장감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음악회가 진행되던 토요일 밤이 마침 WBC 조별리그에서 일본과 한국이 격돌하는 시간대였다는 점이다. 공연 중간중간 관객들은 스마트폰으로 경기 스코어를 숨죽이며 확인했다. 초반에 한국이 3대 0으로 앞서나가다가 이내 5대 5 동점이 되는 피 말리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모든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일본의 승리를 간절히 응원했다 (일본이 승리해야만 대만의 8강 진출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마침내 일본이 한국을 8대 6으로 꺾었다는 낭보가 전해지자 객석 곳곳에서는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국립교통대학교 야구부 주장 겸 포수로 활약했던 황사오화(오른쪽에서 네 번째). 왼쪽부터 당시 함께 뛰었던 1루수 선하오, 투수 차이쭝저의 아들인 차이셴충과 차이셴저우, 유격수 궈쥔장, 2루수 황카이디, 외야수 슈에쥔이. (사진 제공: 황사오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국립교통대학교 야구부 주장 겸 포수로 활약했던 황사오화(오른쪽에서 네 번째). 왼쪽부터 당시 함께 뛰었던 1루수 선하오, 투수 차이쭝저의 아들인 차이셴충과 차이셴저우, 유격수 궈쥔장, 2루수 황카이디, 외야수 슈에쥔이. (사진 제공: 황사오화)

칠흑 같은 암흑기를 넘어서: 단순한 승리를 넘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Ecosystem)'의 재건을 향해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리저이 감독처럼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과 하프 같은 섬세한 악기를 다뤄온 클래식 음악가가 도대체 왜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야구를 했던 것일까? 음악가는 손을 한 번만 크게 다쳐도 그 즉시 치명적인 생명 단절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토록 즐겁게 야구를 즐겼다는 것은, 그 이면에 야구를 향한 엄청난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무췬 교수는 해설을 통해 대만에 야구를 처음 들여온 것은 일본인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과거 자농(KANO) 야구부는 일본인, 한족(漢人), 원주민 등 세 가지 다른 민족적 뿌리를 가진 선수들이 융합해 각자의 특성을 살려 고시엔 준우승이라는 대만 야구사의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후 국민당 정부 시절에는 초기 일본 통치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기조 탓에 야구 육성에 소극적이었고, 농구나 피구 등 다른 스포츠에 집중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만 야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셰궈청(謝國城)이 적극적인 후원에 나서 1969년 진룽(金龍) 리틀야구단을 이끌고 미국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대만의 야구 열기는 꺼지지 않고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리저이 감독은 무척 무겁고 가슴 아픈 역사의 이면도 짚어냈다. 과거 타이둥(台東)의 산골 마을에서 온 훙예(紅葉) 리틀야구단은 비록 세계 챔피언에 올랐지만, 선수들이 대만으로 돌아온 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야구와 관련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육체노동이나 저임금 하층 노동으로 내몰렸고, 그 결과 그들의 평균 수명은 불과 38세에 그쳤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대만에서 프로야구 리그(CPBL)가 정식으로 출범하고, 야구에 인생을 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직업적 기반이 마련된 것은 산업 생태계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진전이었다. 안타깝게도 1996년에 대만 프로야구의 뿌리를 흔드는 대규모 승부조작 및 불법 도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무려 1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거의 모든 구단이 이 끔찍한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팬들은 싸늘하게 등을 돌렸고, 대만 야구계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추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대만의 야구는 오랜 상처를 치유하고 완전히 활력을 되찾았으며, 국제 무대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이번 WBC에서 한국을 상대로 거둔 짜릿한 첫 승리뿐만 아니라, 최근 치러진 각종 국제 대회에서 한국과 7번 맞붙어 5승 2패라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는 대만이 과거 "어떻게든 한국을 한 번만 이겨보고 싶다"라며 앓고 있던 오랜 '언더독 콤플렉스(Underdog Complex)'를 극복하고, 강력하고 존경스러운 라이벌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내적 자신감을 완벽히 회복해 나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24년 제3회 WBSC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대만이 최강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던 드라마틱한 순간은 전 세계 야구 팬들의 예상을 뒤엎은 대이변이었다. 당시 쩡하오쥐(曾豪駒) 국가대표팀 감독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비록 우리가 이겼지만, 우리가 일본보다 전력이 강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 번씩 승리할 때마다 우리가 일본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느낄 뿐입니다."

쩡하오쥐 감독은 현역 선수 시절이던 2004년 라뉴 베어스(La New Bears)에 입단했는데, 당시가 바로 대만 프로야구 승부조작 태풍이 가장 매섭게 휘몰아치던 시기였다. 그는 그 칠흑 같은 암흑기 속에서도 끝까지 결백을 지키며 그라운드에 남아 있었던 선수로서, 대만 야구가 승부조작의 폐허에서 지금의 생명력을 되찾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산증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팀을 이끌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우리는 아직 일본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더 가까워졌다"라고 겸손하게 말한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 및 TSMC에서 25년간 재직하며 100번 이상 일본을 방문했다고 밝힌 천젠방(陳健邦) 전 TSMC 부사장. (사진 제공: 규슈·대만 미래연구소)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 및 TSMC에서 25년간 재직하며 100번 이상 일본을 방문했다고 밝힌 천젠방(陳健邦) 전 TSMC 부사장. (사진 제공: 규슈·대만 미래연구소)

그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단순히 대만 선수들이 일류 팀에 도전할 만한 1차원적인 실력을 갖췄는지 여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대만 야구의 '환경과 제도', 즉 끊임없이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고 자생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풍부한 자양분을 갖춘 '완전하고 건전한 생태계(Ecosystem)'를 제대로 구축했는지에 대한 묵직한 화두였던 것이다.

야구 그라운드에서 반도체 웨이퍼 팹(Fab)으로: 대만 반도체가 돌파구를 열어젖힌 '군집(Cluster)'과 초연결의 철학

야구장에서 강조된 '환경과 제도'라는 키워드를 첨단 산업계로 돌려보면, 대만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패권을 쥐고 비상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와 완벽하게 동일한 '생태계(Ecosystem)' 구축 논리의 실천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나의 오랜 일본인 친구이자 베테랑 언론인인 노지마 쓰요시(野島剛) 선생은 현재 35명의 일본인 지인들과 함께 장장 9일간 900킬로미터를 달리는 자전거 대만 일주 여정에 올라 있다. 2011년에 발생한 3.11 동일본 대지진이 올해로 15주기를 맞이함에 따라, 당시 대만이 일본에 보여준 전폭적인 지지와 아낌없는 구호 성금에 깊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기획된 라이딩 행사다.

노지마 선생은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대만과 일본 양국의 주요 야구 선수, 감독, 야구 관계자 등 약 10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하여 《야구와 방추(野球與棒球)—바다를 건넌 백구와 대만·일본 백년의 기억》이라는 역작을 집필했다. 이 책에는 세계적인 홈런왕 오사다하루(王貞治)를 비롯해,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호령했던 궈타이위안(郭泰源), 뤼밍츠(呂明賜) 등 대만 출신 스타 플레이어들의 눈부신 정점과 쓰라린 좌절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저서를 통해 이 책을 쓴 목적이 단순히 승패나 야구 기록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묻고 싶었다고 한다. "이들은 어떻게 국경의 장벽을 넘어 시대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았는가? 또한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사회 속에 어떻게 족적을 남기고, 정체성을 인정받으며,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해 냈는가?"

《야구와 방추》는 한 편의 훌륭한 스포츠 역사서이자 르포르타주 문학인 동시에, 하얀 야구공의 시선을 빌려 새롭게 써 내려간 '대만·일본 100년사'이기도 하다. 노지마 선생은 대만과 일본 간의 야구 교류가 양국 관계의 압축판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대만과 일본이 공유하는 야구 공동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인 언어로는 그 복잡다단한 역사를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사람과 사람이 그라운드 위에서 함께 달리고, 배트를 휘두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진실되고 가슴을 울리는 해답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주말, 대만과 일본의 반도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한 심포지엄에 참석한 나는 더욱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규슈·대만 미래연구소(九州・台灣未來研究所)가 주최한 학술 행사에 전(前) TSMC 부사장인 천젠방(陳健邦) 선생을 초청하는 실무를 도왔다. 그는 'TSMC의 초심, 야망 그리고 신화'라는 주제의 기조연설을 통해 TSMC의 성공 비결과 대만·일본의 끈끈한 산업적 유대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했다.

천젠방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과 TSMC에서 근무했던 25년 동안 일본을 100번 넘게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반도체 시장을 절대적으로 호령하는 압도적인 1위 국가였기에, 그는 수많은 일본 반도체 업계의 선구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일본 언론의 심층 보도와 반도체 전문 서적들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91년 일본 NHK는 일본의 '전자 입국(電子立國)'을 다룬 자서전 격의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2000년, 일본의 학자 미즈하시 유스케(水橋佑介)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심상치 않은 부상에 주목하며 '대만의 전자 입국'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천 선생은 2000년부터 2025년까지 TSMC의 매출액이 무려 25배나 경이적으로 폭증했다는 수치를 제시하며, 당시 일본 전문가들이 대만의 잠재력을 알아본 판단이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했는지를 증명했다.

거대 종합반도체기업(IDM) 모델의 트랜스포메이션 한계와 대만 반도체가 글로벌 패권을 거머쥔 3가지 열쇠

그는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초면인 일본 친구들조차 대만에서 온 손님에게 깊은 존중과 예의를 표하는 모습에서 항상 가슴 따뜻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대만 반도체 산업이 오늘날과 같이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산업 구조와 역사적 관점을 아울러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했다.

첫째, 대만은 지정학적으로 영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비즈니스를 하든 필연적으로 타인과 협력해야만 했다. 이러한 환경이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촘촘하고 강력한 '군집 효과(Cluster Effect)' 및 초연결 생태계를 탄생시켰다. 둘째, 대만은 초기 경제 기반이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했고, 모든 구성원들이 어떤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는 지독한 회복탄력성을 체득했다.

그가 꼽은 세 번째 이유는 대만이 지리적으로 일본과 매우 가깝다는 점이었다. 1980년대 일본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반도체 1위 국가였고, 대만은 기술적 측면에서 항상 선두 주자인 일본을 우러러보며 치열하게 벤치마킹하고 추격했다. 그 오랜 추격의 끈기가 있었기에 비로소 혁신의 변곡점을 지나 일본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강연 도중 무척 흥미로운 역사적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40년 전, 대만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3위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그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그토록 고생한 어머니가 3위라니 참 불쌍하다"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2위는 당시 대만을 통치하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부의 이데올로기 교육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대망의 1위는 과연 누구였을까? 바로 일본에서 건너온 만화 주인공인 고양이 로봇 '샤오딩당(小叮噹)' (현재의 도라에몽)이었다. 이를 통해 과거 일본의 소프트파워가 대만 사회에 얼마나 거대하고 깊숙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천 선생은 일본 반도체 업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가와니시 쓰요시(川西剛)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과거 일본 도시바(Toshiba)의 반도체 사업부를 총괄하며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수장이었다. 천 선생은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글로벌 반도체 행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며, 당시 가와니시가 남긴 유명한 명언을 소개했다. "반도체 산업은 경영자에게는 끔찍한 지옥과 같지만, 기술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다."

가와니시가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반도체 산업이 기술 변화의 속도가 무섭도록 빠르고 거대한 사이클(경기 순환)을 타기 때문이다. 호황일 때는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으지만, 불황이 닥치면 감당하기 힘든 천문학적인 적자를 내기 일쑤이므로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 입장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도전적인 환경일 수밖에 없다. 반면, 기술 개발에 몰두하는 엔지니어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한계를 돌파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무한한 자아실현과 발전의 기회가 열려 있는 매력적인 산업인 것이다.

그러나 훗날 일본의 대형 종합반도체기업(IDM)들은 순조로운 발전 궤도를 이어가지 못했다. 도시바를 비롯해 NEC, 히타치 등 굴지의 일본 대기업들은 수직계열화된 거대한 그룹 구조 안에 수많은 투자 사업을 껴안고 있었고, 반도체는 그중 하나의 사업 부문에 불과했다. 구조적 한계로 인해 사업부 분사(Spin-off)나 전략적 인수합병(M&A) 등 발 빠른 트랜스포메이션(전환) 타이밍을 놓쳤고, 그로 인해 글로벌 무대에서 뼈아픈 경쟁력 약화를 겪어야만 했다. 반면, 대만은 반도체 위탁 생산에만 올인하는 순수 파운드리(Pure-play Foundry) 모델과 유연한 파트너십에 극도로 집중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성공 궤도를 개척해 냈다.

천젠방 선생이 통찰력 있게 분석한 대만과 일본 반도체 산업의 상관관계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야구 그라운드 위에서든, 미세 공정이 돌아가는 반도체 팹(Fab) 안에서든, 대만과 일본의 운명은 수없이 교차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양국은 각자의 환경에 맞춰 전혀 다른 산업적 풍경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 역동적인 변화의 과정은 우리 모두가 깊이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만이 야구라는 스포츠를 발전시키는 궁극적인 목표는 결코 오타니 쇼헤이를 이기거나, 라이벌인 한국이나 일본을 꺾는 단순한 승패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한 목표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가슴 뛰는 열정을 품고, 설령 절망적인 역경에 처하더라도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불굴의 선수를 육성하는 데 있다. 오늘날 대만의 야구 선수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진정한 스포츠맨십과 회복탄력성을 체득해 나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팀 타이완'의 끈질긴 대만 정신(Taiwan Spirit)이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어떤 직업, 어떤 첨단 산업, 혹은 어떤 개인에게 적용되더라도, 앞으로 세계 무대의 각계각층에서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나갈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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