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반도체의 '조산자(造山者)' 중 한 사람: Chintay Shih는 어떻게 공업기술연구원을 이끌어 '호국신산' TSMC를 키워냈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이 '우리 반도체 산업을 훔쳐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만 반도체 산업의 리더 중 한 명인 Chintay Shih(史欽泰)가 직접 겪은 출발점은 이렇다. 1976년 대만은 총예산이 1,000만 달러에 이르는 계획으로 미국 RCA의 기술 라이선스를 얻었고, 엔지니어 19명을 미국으로 연수 보냈다. TSMC는 그로부터 11년 뒤에야 탄생했다. 지난 50년 동안 대만은 어떻게 이 길을 걸어왔을까?
"미중 대립 속에서 대만은 이미 쟁탈의 대상이 됐다." 공업기술연구원(ITRI) 전 원장이자 현재 국립칭화대학 명예교수인 Chintay Shih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현재 성과와 과제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Chintay Shih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길을 연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공업기술연구원은 대만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응용연구기관으로, 그는 이곳의 현장 엔지니어에서 원장까지 올랐다. RCA 기술 도입, 시범 공장 건설부터 UMC(聯華電子), TSMC, 뱅가드(VIS, 世界先進) 등의 분사에 이르는 전 과정에 직접 참여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 있었던 몇 안 되는 핵심 인물이다. 대만 반도체의 발전을 다룬 Hsiao Chu-chen(蕭菊貞) 감독의 다큐멘터리 '조산자(造山者, A Chip Odyssey)'에서도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올해 80세인 그는 여전히 정정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대만에서 가장 자주 초청받는 업계 원로가 됐다. 그가 지난 50년간 대만 산업의 중요한 발전 과정, 특히 대만이 '공업기술연구원 시범 공장에서 호국군산(護國群山)으로' 나아간 과정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 성공의 과정과 경험은 세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대만에서는 TSMC를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의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 '호국군산'은 이 별칭을 여러 산, 즉 기업군으로 넓힌 표현이다.)
필자는 모리스 창(張忠謀)이 TSMC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사람이라면, Chintay Shih는 대만이 그 자리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본다. 그는 기술 도입, 시범 공장, 기업 분사, 인재 양성의 모든 고리에 참여했고, 지금도 이 역사를 온전히 들려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2026년 10월 10일 대만의 국경일에 필자는 Chintay Shih와 Stan Shih(施振榮, 에이서 창업자) 두 원로가 참석한 '쌍십 포럼'의 사회를 맡았다. 포럼이 끝난 뒤 Chintay Shih와 따로 심층 인터뷰를 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이 왜 이렇게 성공했는지 알고 싶은 해외 독자들에게 더 많은 1차 자료를 전하고자 그 내용을 정리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1974년 두유 가게 아침 모임부터 TSMC 분사까지, 공업기술연구원은 기술과 인력을 산업계에 넘겼다
Q: 대만 반도체의 기초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대만 반도체 산업의 첫 단계는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대만은 환경도 여건도 좋지 않았고, '우환 속에서 태어난' 시대였습니다.
먼저 1963년부터 1965년 사이에 국립자오퉁대학(交通大學)이 반도체 실험실을 세웠습니다. 1966년에는 K.T. Li(李國鼎)가 수출가공구를 설치했고, 가오뎬(高電), 필립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대만에 들어와 IC 테스트와 패키징에 투자했습니다. 같은 해 Fei Hua(費驊, 음역)와 Wen-Yuan Pan(潘文淵, 음역)이 '근대공학세미나'(METS)를 시작해 2년마다 해외 전문가들을 대만으로 불러들였습니다.
1973년에는 Sun Yun-suan(孫運璿)이 공업기술연구원을 설립했습니다. 재단법인 형태를 취해 인사와 회계 제도를 공무원 체계와 다르게 했기 때문에 인재 채용과 장비 구매가 쉬웠습니다. 이것이 '조직의 제도 혁신'입니다.
1974년 2월 타이베이 난양가(南陽街)의 두유 가게 '샤오신신(小欣欣) 두유점'에서 400대만달러짜리 아침 식사 자리가 열렸습니다. Sun Yun-suan, Fei Hua, Kao Yu-shu(高玉樹, 음역), Wang Chao-chen(王兆振, 음역), Fang Hsien-chi(方賢齊, 음역), Kang Pao-huang(康寶煌, 음역), Wen-Yuan Pan 등 정부 쪽 7명이 모였고, Wen-Yuan Pan이 '집적회로 발전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1974년 10월 Wen-Yuan Pan은 해외기술고문위원회(TAC)를 만들었고, 결국 대만이 총예산 1,000만 달러로 미국 RCA의 기술 라이선스를 얻도록 도왔습니다.
1976년은 '실리콘 아일랜드 원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Sun Yun-suan은 RCA로 연수를 떠나는 첫 엔지니어 19명을 불러 국기를 수여하고 "성공만 허락되고 실패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당부했습니다.
Q: 1976년을 '실리콘 아일랜드 원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당시 공업기술연구원 동료들을 이끌고 미국 RCA에서 연수를 받으셨고, 대만으로 돌아온 뒤에는 공업기술연구원을 이끌고 대만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참여하셨습니다. 성공의 핵심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 먼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공업기술연구원 전자공업연구소(ERSO)가 주둥(竹東)의 중싱(中興) 캠퍼스에 시범 공장을 세웠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연구기관과 달리 양산과 상업화를 목표로 했고, 제조, 테스트, 패키징, 품질 관리, 원가 관리에서 판매까지 전 과정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7마이크로미터 CMOS를 생산했는데 수율이 RCA를 크게 웃돌았고, CIC 0001을 자체 설계했습니다. 소량 생산과 판매가 순조롭게 이뤄지면서 정부의 자신감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제품 선택에서도 틈새 전략을 택해 메모리와 CPU를 피하고 로직 IC에 집중했습니다. 첫 주문은 대만대학 화교 학생이던 Wei-Chung Chu(祝偉中, 음역)가 낸 전자시계 IC 10만 개였습니다. 이후 음악 카드, 장난감, 전화 다이얼, 전자 체중계, 맞춤형 IC로 넓어졌습니다. 1978년에는 공업기술연구원이 전자공업연구소 캘리포니아 사무소를 세웠습니다.
그다음 공업기술연구원은 기업 분사를 시작했습니다. UMC와 TSMC부터 대만마스크(台灣光罩), 뱅가드까지 연구소의 성과를 산업계로 옮겼습니다. 주요 분사 사례는 아래 그림에 정리했습니다.

Q: 이 분사 사례들이 대만 반도체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국제 반도체 산업은 어떻게 움직였고, 대만에서는 그에 대응해 어떤 중요한 발전이 있었습니까?
A: 무어의 법칙이 초고밀도 집적회로(VLSI) 기술 혁명을 이끌었고, 설계 방법, 신소재, 신장비가 과제였습니다. 1984년 Sun Yun-suan이 VLSI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또 PC 산업은 대만 반도체 업계의 훈련장이었습니다. ERSO는 1984년 IBM 호환 PC를 개발했고, 이후 PC 주변기기, 칩셋, 워크스테이션 연맹, 노트북 연맹을 추진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세계 노트북 시장의 성장이 대만 IC 산업을 이끌었습니다.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는 핵심 부품이 부족했습니다. PC 산업이 커지면서 CPU와 메모리가 병목이 됐습니다. 삼성은 메모리 기술 협력을 제안했고, 당시 정부와 민간에서도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서브미크론 계획이 시작됐습니다. 당시에는 미국 SEMATECH(반도체제조기술컨소시엄) 모델을 참고해 연맹(UMC, TSMC, 이트론(鈺創), 매크로닉스(旺宏) 등)을 구성하고, 4년 동안 70억 대만달러와 300명을 투입해 16M DRAM과 4M SRAM을 개발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뱅가드를 분사했습니다.
2000년이 되자 대만 반도체 산업은 UMC, TSMC, 윈본드, 매크로닉스, 모젤바이텔릭(茂矽), 파워칩(力晶), 뱅가드 등으로 이뤄진 기업군을 형성했고, IC 설계 회사도 100곳이 넘었습니다.
지리적 집적도 중요했습니다. 공업기술연구원, 광밍신춘(光明新村), 신주과학단지, 자오퉁대학, 칭화대학이 대만의 실리콘밸리인 '십리천하(十里天下)'를 이뤘습니다. (1리는 약 500m로, 10리는 약 5km다.)
Q: 이 발전의 역사에서 핵심 인물은 누구라고 보십니까?
A: 첫 번째는 Wen-Yuan Pan입니다. 그는 RCA 연구실 주임 자리를 내려놓고 조기 퇴직했고, 부인도 뉴저지주의 종신 교직을 포기했습니다. 급여를 받지 않고 관직도 맡지 않았으며, 두 달마다 대만과 미국을 오갔습니다.
두 번째는 Fang Hsien-chi입니다. 그는 전신총국 국장 출신으로 1978년부터 1985년까지 공업기술연구원 원장을 지냈고, UMC 초대 이사장, 정보산업진흥원(資策會) 초대 집행장을 맡았습니다. 95세 때도 대만 반도체의 성공 비결을 "운이 좋았고, 사람을 잘 찾았다"고 정리했습니다.
세 번째는 Ding-Hwa Hu(胡定華, 음역)입니다. 그는 IC 기술 도입 계획의 책임자로, 스스로 나서서 계획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전자공업연구소(ERSO)에 '과감히 개척하는' 문화를 심었습니다. 이상을 갖고, 책임을 지고, 팀으로 움직이며, 개방적이고 자주적이며, 과감히 시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수를 용인하는 문화입니다.
1988년 이건희 회장이 대만을 찾아 충고했지만, 대만은 메모리 진출을 결정했다
Q: 앞서 삼성이 대만에 협력을 제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대만은 1990년대에 DRAM 메모리 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했습니다. 1988년 삼성의 이건희(李健熙) 회장이 대만을 찾았고, 모리스 창, Stan Shih, 그리고 원장님 세 분을 한국 방문에 초청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이미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는 점을 밝히면서 대만이 메모리 산업에 섣불리 투자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에이서는 이후 더치반도체(德碁, TI-Acer)에 투자했고, 공업기술연구원도 서브미크론 계획을 추진해 뱅가드를 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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